2000년대 이후
암 환자 가족들이 병원비 때문에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이 한때는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다.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환자는 병상에 누워 있고, 원무과 직원이나 간호사는 환자 가족에게 병원의 입장을 설명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가까스로 뭉칫돈을 구한 환자 가족이 숨을 헐떡거리며 병원 로비에 나타나는 장면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병원비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어도 위와 같은 장면들은 더 이상 드라마에서 흔하지 않다. 2005년부터 시행된 '암환자 본인일부부담 산정특례제도'에 따라 환자 본인의 부담률은 5%로 낮아졌다. 병원으로서는 설령 5%를 받지 못하더라도 국가로부터 95%를 받을 수 있다.
건강보험제도 시행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이지만, 이 제도가 정착하는 초기 과정에서 헌신적인 역할을 한 의사가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장기려가 그 주인공(1911~1995)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인 1995년 12월 26일, 언론들은 '장기려 박사 별세 한국의 슈바이처'(<매일경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별세'(<동아일보>), '인술(仁術)의 한평생 한국의 슈바이처'(<조선일보>) 등의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의료보험법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63년 12월 16일이지만, 제도가 실제 시행된 것은 훨씬 뒤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한양대학교 산학협력단이 펴낸 <한국 건강보장 근대사 연구>는 "1964년과 1969년 두 차례에 걸쳐 시행령만 제정 또는 개정했을 뿐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지는 못하였"다고 기술한다.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된 것은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이다.
의료보험법이 제정되긴 했지만 제도가 시행되지 않던 시기에 과감하고 헌신적으로 뛰어들어 제도의 필요성과 실현 가능성을 온몸으로 실증한 인물이 바로 장기려다. 그가 주도한 조직이 부산의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이다. 위 책은 "23개 교회 대표자들이 참여하여 1968년 5월 13일 723명의 회원으로 부산시 동구 초량동 500번지 복음의원 안에 위치한 부산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고 기술한다.
이 조합의 회원 수는 급속히 늘어났다. 2003년에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나온 황우선의 석사학위논문인 '장기려의 생애와 기독교 신앙'은 조합 설립 6년 뒤인 1974년에 회원 수가 1만 5천을 넘고 그 뒤에 20만을 돌파했다면서 "부산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부산시민의 의료보험조합 역할을 하였다"고 말한다.
장기려는 이 제도가 한국 제2의 도시에서 성공을 거둬 전국적 시행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산파 역할을 했다. 자신이 직접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회원 모집을 위해 지역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전을 벌였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해야 할 일을 그와 동료들이 선구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이들이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정부와 여타 지역이 자신감을 얻고 제도 시행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장기려와 동료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암 환자 가족들이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이 좀 더 오랫동안 드라마에서 묘사됐을 것이다.
장기려의 운동이 성공한 데는 덴마크 유학 시절에 그곳 건강보험제도를 경험한 사회사업가 채규철 등의 협력이 원동력이 됐다. 채규철 등이 장기려에게 운동을 제안한 것은 장기려가 흔들림 없이 일을 추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사업을 민간이 추진했으니, 초창기 참여자들이 당연히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참여자들이 증빙자료도 남기지 않고 자기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해도 성공을 기약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기려는 흔들림 없이 그런 희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여 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희귀했던 한국인 의학박사
1911년에 평북 용천군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한 장기려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해인 1928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훗날의 서울대 의대) 학생이 됐다. 성적으로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그곳은 1년 학비가 1백원이고 경성의전은 35원이라서 후자를 택했다고 한다. 이때는 집안이 경제적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당시 입시 공부를 하면서 그가 매일같이 기도한 내용은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다. 10대 중후반인 그는 "들어가게만 해주신다면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늘에 맹세했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고 서약했지만, 의학교를 졸업한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정반대의 길이었다. 그것은 돈 잘 버는 의사의 길이었다.
그는 백병원(당시엔 백외과) 원장이자 저명한 의학자인 백인제의 수제자였다. 스물한 살 때인 1932년 3월에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다음 달부터 백인제 교수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 학교 강사를 지냈다.
또 그는 일제강점기에 희귀했던 한국인 의학박사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40년 9월 22일 자 <매일신보>는 20대 후반인 그의 얼굴 사진과 함께 그가 백인제의 제자라는 점, 그달 16일에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부의 박사학위논문 심사를 통과한 점 등을 소개했다.
백인제의 제자에다가 의학박사가 된 일은 그의 지위를 단번에 격상시켰다. 29세 때인 1940년 3월에 기독교계 병원인 평양 기휼병원의 외과과장이 된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지 2개월 뒤인 그해 11월에 그 병원 원장이 됐다. 그런데 그는 2개월밖에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그 병원의 실무를 주도하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들이 그의 리더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브란스의전 출신들이 못마땅해 한 데는 그의 월급 액수도 크게 작용했다. 이용설 박사(세브란스병원 외과 창설자)의 추천을 받고 입사한 그가 너무 많은 월급을 받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위 논문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장기려보다 1년 먼저 나온 유기원(전 서울대 총장 유기천 박사의 맏형)의 월급이 215원인데, 이용설 박사가 '장기려는 학위가 내정돼 있었기 때문에 일단 250원을 받고, 학위가 통과되면 300원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39년 2월 24일 자 <조선일보>는 "요즘 보통 식모의 월급은 조선 가정엔 오륙 원, 내지 가정엔 십원 가량"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인 가정에서 가사도우미가 매월 받는 10원가량은 청년 의사 장기려가 하루나 하루 반나절에 벌 수 있는 돈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료인
서른두 살 때인 1943년에 식민지 한국 최초의 '간 절제 수술'을 성공시켜 더욱 큰 명성을 얻은 장기려는 처음에는 위와 같이 고소득 의료인이었다. 그러나 평양외과대학 및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2월에 월남한 뒤로 그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남한에 온 그는 10대 후반 때의 그 기도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료인의 길에 발을 내디뎠다.
장기려 1주기 다음날 발행된 1996년 12월 26일 자 <한겨레>는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 영도에서 천막병원을 차려 피란민을 돌보는" 일을 했다고 소개한다. 이 보도 내용처럼,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는 하늘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의사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 때 고액 월급자였던 그는 천막병원을 운영한 뒤로는 돈과 물질에 초연했다. 천막병원을 토대로 복음병원(훗날의 고신의료원)을 발전시킨 그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진료비와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직원 숫자가 늘어나고 병원 규모가 커져 공식적으로 치료비만 받게 됐을 때도, 그는 직원들의 눈치를 살펴 가며 소신을 실천했다. 위 논문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여전히 수술비 또는 진료비를 부담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장기려를 찾아와 애원하였다. 장기려는 하는 수 없이 '치료비가 없어 퇴원할 수 없다'며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원장이라도 마음대로 퇴원시킬 수 없으니 늦은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놓으면 몰래 도망가세요'라고 말해주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없어졌다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치료비를 내지 않은 환자가 달아났으니 직원들에게는 정말 큰일이었다. 그러나 장기려는 '그 환자가 오죽하면 도망갔겠느냐'며 환자 편을 들어주었다."
장기려는 야반도주를 돕는 외에, 자기 월급을 떼어 치료비를 대주는 등의 방법으로도 가난한 환자들을 도왔다. 25년간 복음병원 원장 일을 하고 은퇴한 뒤에 그는 병원 옥상의 옥탑방에 기거했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전 재산은 1500만 원이다.
그해 6월 22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 전날 서울 양재동 농협공판장에서 경북 의성 안계미 1가마니가 12만 4400원에 거래됐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장기려의 유산은 지금 돈으로 환산해도 3000만 원 내외를 크게 넘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술을 펼치겠다는 약속을 지키느라 그 자신의 창고를 불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물질에 초연한 의사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갖고 그가 주도하는 민간 의료보험조합운동에 힘을 보탤 수 있었다. 그의 희생이 세상을 감동시킨 결과로 오늘날 우리는 좀 더 일찍 건강보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높이 평가해 막사이사이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이 수여되긴 했지만, 그가 사회에 끼친 공로를 온전히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