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후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⑩ 송도고등학교
  • 작성일202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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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인천] 새로운 100년 역사를 향해 가는 길

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열 번째 등굣길을 따라 옥련동 비탈길을 오른다. 오래된 송도에서, 멀리 새로운 송도를 굽어보듯 자리한 송도고등학교. 한 세기가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그곳을 한국 농구의 전설 유희형(47회 졸업) 전 KBL 심판위원장과 함께 걸었다.

 

 

남다른 교육이 탄생시킨 농구 명문

184cm. 훤칠한 키의 남성이 학교에 들어선다. 초창기 한국 농구 스타플레이어의 계보를 이었던 유희형이다. 올해 74세라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역시나 농구 코트다. 송도체육관. 손자뻘 되는 후배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한국 농구의 산실이다.
“내가 운동할 때만 해도 체육관 같은 건 꿈도 못 꿨어. 교실 6개를 이어붙여 체육관으로 만들었지. 여름엔 쌀과 이불을 가져와 함께 먹고 자며 훈련했어. 그런데도 그렇게 성적이 좋았다고.”
유희형은 한국 농구의 가장 눈부셨던 시절을 함께했다. 송도중학교 3학년 시절 모교를 사상 처음 전국대회 1위에 올려놨던 그는 1968년 국가대표에 선발되며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주전 선수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득점 기계 신동파, 농구 천재 김영일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던 이인표, 김영기가 버티고 있었다. 남은 한 자리가 바로 최연소 국가대표 유희형이었다.
“내 농구 인생과 송도고 농구부에는 은인이 한 분 있어. 고故 전규삼 선생님이야. 송도고가 개성에 있을 때부터 교사로 재직하셨는데, 만능 스포츠맨이었어. 1952년 송도고가 인천에서 다시 문을 열 때도 함께하셨지. 개인적인 이유로 교편을 내려놓은 뒤에도 무보수로 농구팀을 지도할 만큼 열정이 대단하셨어.”
전규삼 선생의 훈련 방식은 획기적이었다. 미국 NBA 선수들과 같이 빠르고 화려한 플레이를 주문했다. 탄탄한 기본기는 그야말로 기본. 송도고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5~1966년에는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했다. 서울 소재 고등학교의 전유물이던 우승컵을 인천의 학교가 들어 올렸다. 그렇게 송도고는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신기성, 김승현, 김선형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배출하며 농구 명문의 반열에 올랐다.